헤이안 시대

794년부터 1185년까지 약 390년 이어진 헤이안 시대.
그 이전 시대인 나라 시대에는 천황을 군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와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권력이 집중된 조정 내부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이 계속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에는 다시 지방 분권이 진행되고 무사가 대두하면서 정치 체계가 크게 바뀌어 갑니다.
정치의 중심이었던 귀족에서 무사로, 권력이 어떻게 이동해 갔는지 되짚어봅시다.

포인트

  • 헤이안쿄로 천도
  • 오랫동안 이어지던 견당사가 폐지되고, 일본 고유의 문화가 싹트기 시작
  • 후지와라 씨의 섭정 정치가 전성기를 맞이
  • 치안 악화와 조정의 재정난으로 무사가 대두
  • 권력 다툼 속에서 무사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강한 정치력을 갖게 됨
  •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불만을 품은 황족과 겐지(미나모토 씨)가 손잡고, 겐지가 헤이시(다이라 씨)를 멸망시킴

헤이안 시대의 흐름

약 390년이나 이어진 헤이안 시대를, 주요 사건 중심으로 흐름을 되짚어봅시다.

불교와 거리를 두기 위해 헤이안쿄로 천도

헤이안 천도 1,100년을 기념해 세운 헤이안 신궁
헤이안 천도 1,100년을 기념해 세운 헤이안 신궁

나가오카쿄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 794년부터 헤이안 시대가 시작됩니다.
나라 시대 후반에는 율령 정치가 아니라, 신과 부처의 신탁을 중시하는 신탁 정치로 바뀌어 갔습니다.
불교와 정치의 유착을 우려한 간무 천황(桓武天皇)이 율령 정치로 되돌리기 위해, 사원과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자 헤이안쿄로 천도했습니다.
율령 정치로 돌아가려면 재정이 불안했기 때문에, 영토를 넓혀 해결하려 합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를 초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해 도호쿠 지방의 에미시(蝦夷) 토벌에 파견.
에미시를 지배하에 두고 국토를 확장해, 율령 제도로 돌아가기 위한 재원을 확보했습니다.

새로운 불교의 전래와 견당사 폐지

헤이조궁터 역사공원의 견당사선
헤이조궁터 역사공원의 견당사선

신탁 정치에서 율령 정치로 되돌아가려는 흐름 속에서, 견당사로 당나라에 건너갔던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가 귀국합니다.
사이초는 엔랴쿠지를 세워 천태종을.
구카이는 곤고부지를 세워 진언종을 일본에 전했습니다.
같이 견당사로 다녀온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는 당의 세력이 약해졌음을 느끼고, 견당사 폐지를 건의합니다.
그 결과 견당사 제도는 폐지됐습니다.

후지와라 씨의 섭정 정치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별장이었던 뵤도인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별장이었던 뵤도인

나라 시대부터 권력을 키워온 귀족은, 헤이안 시대에 들어 그 힘을 더 강화합니다.
그중에서도 후지와라 씨는 자신의 후손을 천황으로 세우며 압도적인 권력을 손에 넣습니다.
그 계기가 된 인물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입니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계략으로 조카인 미치야스 친왕(道康親王)을 황태자로 세워, 천황의 외척이 되며 강한 권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 다른 귀족을 배척해 갔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딸을 후궁에 들입니다.
미치야스 친왕과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딸 사이에서 훗날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이 되는 고레히토 친왕(惟仁親王)이 태어나자, 황족이 아닌 인물로는 처음 태정대신에 취임하고 이듬해 섭정에 오릅니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이후에도 한동안 후지와라 씨는 섭정·관백 등 중요한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 씨의 섭정 정치가 정점을 찍은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성기의 섭정을 맡았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읊은 “이 세상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없다. 보름달에 이지러짐이 없듯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갖춰졌다”는 노래는,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씨의 정치력과 권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무사 집단의 등장

쇼엔(荘園) 이미지
쇼엔(荘園) 이미지

지방의 호족들은 하인 등을 동원해 농지를 개간하며 부를 축적했습니다.
호족들이 개간한 농지를 쇼엔(荘園)이라고 합니다.
쇼엔이 늘고, 조정이 호적과 토지를 관리하지 못하게 되면서 10세기 무렵에는 조정이 세금을 거두기 어려워졌습니다.
재정이 부족해지며 지방 치안을 조정의 힘만으로 안정시키기 힘들어집니다.
치안이 어지러운 가운데, 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쇼엔을 가진 호족들은 무장한 사람을 고용하거나 농민을 무장시켜 무력을 갖게 됩니다.
쇼엔을 지키기 위해 고용한 호위가 무사의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치안을 지킬 재력도 무력도 없던 귀족은, 무력을 가진 호족에게 의뢰해 치안을 유지하는 형태로 바뀌어 갑니다.
조정으로부터 의뢰나 보호를 받은 호족은 더 힘을 키워, 무사로서 가신을 모아 무사단을 결성합니다.

힘을 키운 무사들의 반란

무사 이미지
무사 이미지

무사단을 거느린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는 각각 반란을 일으킵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간토 지방 8개 국을 점령하고 ‘신노(新皇)’를 자칭하며 독립 국가를 세웠습니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최중요 거점인 다자이후를 점령합니다.
조정에는 이 두 반란을 진압할 무력이 없었기에, 무사단 중에서도 강한 세력을 지닌 겐지(미나모토 씨)와 헤이시(다이라 씨)의 힘을 빌려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이 반란으로 민중의 조정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반대로 무사들은 민중의 신뢰를 얻어 갑니다.
조정의 신뢰도 얻은 겐지는 동일본으로, 헤이시는 서일본으로 세력을 넓혀 갑니다.

인세이(院政)가 시작되며 후지와라 씨의 권력이 약화

헤이안 시대 권력 다툼의 무대가 된 교토 이미지
헤이안 시대 권력 다툼의 무대가 된 교토 이미지

오랫동안 이어진 후지와라 씨의 섭정 정치였지만, 후지와라 씨와의 관계가 옅은 고산조 천황(後三条天皇)이 즉위하며 상황이 바뀝니다.
후지와라 씨 중심의 정치 체제 개혁을 추진하고, 그 뒤 즉위한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은 섭정에 대신하는 제도인 ‘인세이(院政)’를 채택해 후지와라 씨의 정치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인세이(院政)란 천황이 양위한 뒤의 상황(上皇)이, 천황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로 섭정·관백 자리를 차지하던 후지와라 씨가 정권을 잡기 어려워졌습니다.

권력 다툼 속에서 헤이시(다이라 씨)가 권력을 쥐게 되다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신앙하던 미야지마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신앙하던 미야지마

정치 체제가 바뀌어 가는 가운데, 스토쿠 상황(崇徳上皇)과 고시라카와 천황이 대립하며 무사들까지 휘말린 세력 다툼 ‘호겐의 난(保元の乱)’이 시작됩니다.
이 다툼은 고시라카와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나고, 그 편에서 싸운 헤이시(다이라 씨)와 겐지(미나모토 씨)는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호겐의 난 포상에 차이가 있다며 불만을 품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일으킵니다.
헤이지의 난은 헤이시에 의해 진압되고, 헤이시는 정치력도 강화해 갑니다.
그리고 고시라카와 상황의 인세이 아래, 헤이시의 수장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는 태정대신으로 임명되며 강한 정치력을 갖게 됩니다.

헤이시(다이라 씨)의 멸망

미모스소가와 공원의 단노우라 전투 모티프 모뉴먼트
미모스소가와 공원의 단노우라 전투 모티프 모뉴먼트

정치를 마음대로 움직이던 다이라노 기요모리였지만, 귀족·사원·지방 무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져 갑니다.
불만을 품은 황족과 겐지(미나모토 씨)가 손을 잡고 타도 헤이시를 목표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가마쿠라를 거점으로 하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보낸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에 의해, 단노우라에서 헤이시는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 막부를 열며 가마쿠라 시대로 넘어갑니다.

헤이안 시대의 문화·풍습

시대 흐름뿐 아니라 문화·풍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면, 헤이안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는 견당사가 폐지되며, 당에서 전해진 문화가 일본의 풍습에 맞춰 일본 고유의 ‘국풍 문화(国風文化)’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문자의 발달로 문학이 번성

헤이안 시대에 유행한 와카 이미지
헤이안 시대에 유행한 와카 이미지

일본에서 문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헤이안 시대.
중국의 한자를 사용해 일본어를 표기했는데, 만요가나(万葉仮名)·소가나(草仮名)·히라가나(平仮名)·가타카나(片仮名)처럼 일본어에 맞는 새로운 문자가 탄생해 갑니다.
문자가 발달하면서, 와카를 편지에 적은 러브레터를 귀족끼리 주고받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방식과 내용으로 여성이 남성을 평가했다고 합니다.
편지뿐 아니라 ‘문학’도 문자 발달과 함께 탄생.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이세모노가타리」 등 현대에도 남은 문학 작품이 헤이안 시대에 탄생했습니다.

일본 문화를 받아들인 건축 양식

신덴즈쿠리 특징을 볼 수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
신덴즈쿠리 특징을 볼 수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

귀족이 사는 건물도 일본 고유 문화를 반영한 건축 양식 ‘신덴즈쿠리(寝殿造)’로 바뀌어 갔습니다.
신덴즈쿠리(寝殿造)란 흙담으로 둘러싼 부지 중앙에 신덴을 세우고 남쪽에 중정을 두며, 가족이 거주하는 ‘타이노야’를 동·서·북에 배치하는 형식의 건축을 말합니다.
화려한 인상을 주는 구조로, 헤이안 시대 귀족의 생활·문화를 그대로 반영한 건축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분에 따라 정해진 복장

헤이안 시대 귀족 복장 이미지
헤이안 시대 귀족 복장 이미지

나라 시대에도 신분에 따라 복장이 정해져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에는 더 세분화되어 신분별로 복장이 정해졌습니다.
헤이안 시대 귀족은 화려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만큼 옷을 고르는 것부터 입는 것, 입고 있는 것 자체도 상당히 힘들었다고 합니다.
귀족과 달리 서민의 옷은 수수하고 움직이기 편한 것이었습니다.

귀족 사회에서 발달한 오락

귀족 사이에서 유행한 케마리 이미지
귀족 사이에서 유행한 케마리 이미지

일찍 일어나 오전에 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오락을 즐기는 것이 귀족의 생활 사이클이었습니다.
오락 시간이 많았던 만큼,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이어가는 ‘케마리(蹴鞠)’나 단가를 서로 짓는 ‘우타아와세(歌合せ)’ 등 다양한 오락이 생겨났습니다.

극락왕생을 바라는 사상의 유행

극락정토에 피는 연꽃 이미지
극락정토에 피는 연꽃 이미지

후지와라 씨의 섭정 정치가 이뤄지던 무렵, 서민들은 가혹한 세금 징수와 쇼엔을 가진 호족들의 다툼, 잇따른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 속에서 유행한 것은, 현세를 부정하고 극락정토로 왕생하기를 바라는 불교·정토교였습니다.

헤이안 시대의 조금 재미있는 풍습

귀족 중심 사회였던 헤이안 시대.
그 귀족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궁금한 분도 많을 겁니다.
지금 보면 놀랄 만한 풍습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풍습을 소개합니다.

점괘가 ‘흉’이면 일을 쉬었다?

헤이안 시대 귀족은 거의 모든 일을 점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별점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 점괘에서 ‘흉’이 나오면, 그날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결근 사유로 인정되니, 상사에게 혼날 일도 없었습니다.
현대로 치면 아침 TV 운세가 안 좋다고 회사에 안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점에 의존했던 헤이안 시대 귀족의 생활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목욕하는 날도 점으로 정했다

출근 여부뿐 아니라, 목욕하는 날조차 점으로 정해졌습니다.
점으로 정한 날이 아닌데 목욕하면 몸에 사기가 들어와 병들거나 죽는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체취를 가리기 위해 향 문화가 발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스폿

헤이안 시대의 흐름과 문화·풍습을 알았다면, 헤이안 시대부터 남아 있는 건축물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헤이안 시대에 건립된 ‘기타노 덴만구’

헤이안 시대에 창건되어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사(古社) 기타노 덴만구.
전국 12,000여 덴만구 신사의 총본사입니다.
헤이안 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제신으로 모셔, 현재도 전국에서 많은 수험생이 합격 기원을 하러 찾습니다.

극락정토를 떠올리게 하는 환상적인 전각 ‘뵤도인’

헤이안 시대 절대적 권력을 지닌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별장으로 쓰던 건물을, 아들이 물려받아 1052년 사찰로 다시 연 뵤도인.
1994년에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습니다.
헤이안 시대에 유행한 극락왕생 사상을 반영한, 환상적인 궁전 같은 전각은 꼭 봐야 할 볼거리입니다.

세계유산에 등록된 ‘주손지’

850년에 개창한 사찰로, 세계유산에도 등록된 주손지.
경내에 있는 ‘곤지키도(金色堂)’ 내부는 금박으로 장식되어 화려함 그 자체입니다.
곤지키도 내부는 뵤도인과 마찬가지로 극락정토를 이미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진

  • 헤이안 시대 귀족 이미지

    헤이안 시대 귀족 이미지

  • 헤이안 천도 1,100년을 기념해 세운 헤이안 신궁

    헤이안 천도 1,100년을 기념해 세운 헤이안 신궁

  • 헤이조궁터 역사공원의 견당사선

    헤이조궁터 역사공원의 견당사선

  •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별장이었던 뵤도인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별장이었던 뵤도인

  • 쇼엔(荘園) 이미지

    쇼엔(荘園) 이미지

  • 무사 이미지

    무사 이미지

  • 헤이안 시대 권력 다툼의 무대가 된 교토 이미지

    헤이안 시대 권력 다툼의 무대가 된 교토 이미지

  •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신앙하던 미야지마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신앙하던 미야지마

  • 미모스소가와 공원의 단노우라 전투 모티프 모뉴먼트

    미모스소가와 공원의 단노우라 전투 모티프 모뉴먼트

  • 헤이안 시대에 유행한 와카 이미지

    헤이안 시대에 유행한 와카 이미지

  • 신덴즈쿠리 특징을 볼 수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

    신덴즈쿠리 특징을 볼 수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

  • 헤이안 시대 귀족 복장 이미지

    헤이안 시대 귀족 복장 이미지

  • 귀족 사이에서 유행한 케마리 이미지

    귀족 사이에서 유행한 케마리 이미지

  • 극락정토에 피는 연꽃 이미지

    극락정토에 피는 연꽃 이미지

연혁

794년
헤이안쿄로 천도
797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됨
804년
구카이와 사이초가 견당사로 출항
805년
사이초가 귀국해 천태종을 염
806년
구카이가 귀국해 진언종을 염
819년
구카이가 곤고부지 건립
857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태정대신에 취임
876년
세이와 천황이 양위하고 요제이 천황이 즉위
884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요제이 천황을 퇴위시키고 고코 천황이 즉위
887년
고코 천황 붕어. 우다 천황이 즉위하고,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첫 관백이 됨
894년
견당사 폐지
905년
고킨와카슈가 편찬됨
939년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과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발생
1001년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완성
1007년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 완성
1051년
전구년 합전 시작
1053년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뵤도인 호오도 건립
1155년
고시라카와 천황 즉위
1158년
니조 천황 즉위, 고시라카와 상황의 인세이 시작
1068년
고산조 천황 즉위
1072년
고산조 천황 양위, 시라카와 천황 즉위
1083년
후삼년 합전 시작
1107년
도바 천황 즉위
1123년
스토쿠 천황 즉위
1141년
고노에 천황 즉위
1156년
호겐의 난 발생
1159년
헤이지의 난 발생
1167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태정대신이 됨
1180년
겐페이 전쟁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