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さいごうたかもり)는 메이지 유신에 힘쓰며 일본을 근대 국가로 이끈 막말 지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에도 시대(1603년~1868년)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초기에 걸쳐 역사에 남을 활약을 했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두터운 인망을 지닌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고돈(사이고상)'이라는 애칭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고, 지금도 고향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영웅이다.
이 글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애를 따라가며, 인물상과 수많은 업적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

포인트

  • 고향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영웅.
  • 약 260년 이어진 에도 막부를 끝내고, 신정부 수립에 기여.
  •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힘쓰며, 오늘날로 이어지는 제도를 확립.
  • 기여해 온 정부와의 전쟁으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음.

사이고 다카모리 인물 연표

1828년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854년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측근으로 에도에 방문
1862년
사쓰마번의 명령을 거스르고 오키노에라부섬으로 유배
1864년
사쓰마번으로 돌아와 군을 지휘해 조슈번을 격파
1866년
삿초 동맹 성립을 위한 회담 진행
1867년
메이지 신정부에 참여
1868년
에도성 무혈 개성을 위해 가쓰 가이슈와 회담
1873년
조선 사절 파견이 무산되어 사직서를 내고 가고시마로
1874년
사학교 설립
1877년
사학교 학생들의 폭동을 계기로 세이난 전쟁 발발.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자결

사이고 다카모리의 위업

사이고 다카모리는 약 260년 이어진 에도 막부를 끝내고, 신정부 수립에 기여한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각국이 강요한 개국 교섭으로 불평등 조약을 맺은 막부의 권위가 떨어지며, 불만 세력의 '존왕양이 운동(천황을 중심에 두고 외국인을 배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사쓰마번의 중심에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수습하고, '삿초 동맹'을 맺어 세력을 결집해 도막을 성공시킨다.
마지막에는 에도 막부의 중신 가쓰 가이슈(かつかいしゅう)와의 교섭 끝에 '에도성 무혈 개성'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신정부 수립 후에는 오늘날로 이어지는 '학제'·'조세 제도'·'병제'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힘썼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도막·유신의 주역인 오쿠보 도시미치(おおくぼとしみち)·기도 다카요시(きどたかよし)와 함께 '유신 삼걸'로 불린다.

새 시대의 개막과 근대화에 힘쓴 사이고 다카모리
새 시대의 개막과 근대화에 힘쓴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애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이름은 알아도, 성장 과정과 업적까지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이뤄낸 인물인지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의 시대 배경과 함께 보면, 사이고 다카모리의 매력을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가난한 소년 시절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8년 사쓰마국(현재의 가고시마현)에서 사쓰마번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이고 가문은 가족과 사용인을 합치면 16명에 이르는 대가족이었기에, 결코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려 노력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5세부터 유교를 배우기 시작해, 7세에는 사쓰마의 '고주(ごじゅう/무사 자제를 교육·지도하는 자치 조직)'에 들어가 충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고주'에서는 세 살 아래의 소꿉친구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해, 훗날 정부의 요직을 맡는 뛰어난 인물들과 함께 배웠다.
하지만 다른 고주와 다투는 일도 많았고, 어느 날 싸움에서 말리던 당시 11세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대가로 오른팔을 다쳐 칼을 자유롭게 쥘 수 없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무사의 길을 포기하고 학문에 힘쓰기로 결심한다.

무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힘쓴 어린 시절의 사이고 다카모리
무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힘쓴 어린 시절의 사이고 다카모리

시마즈 나리아키라와의 만남과 이별

16세가 된 사이고 다카모리는 농정을 총괄하는 직책 '고리카타카키야쿠타스케(こおりかたかきやくたすけ)'에 취임한다.
기개 있는 상관 사코다 도시나리(さこだとしなり) 아래에서 일에 임하는 자세를 배우는 한편, 빈곤·부정·악정 등 세상의 현실과 불합리를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도 농정에 관한 의견서를 번에 자주 보내기 시작한다.
이 의견서가 사쓰마번 제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しまづなりあきら)의 눈에 띄며, 사이고 다카모리의 인생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측근으로 '나카오코쇼(なかおこしょう/번주의 잡무 담당)'에 임명되며, 산킨코타이 행렬에도 참여했다.
더 나아가 에도 도착 직후 '니와카타야쿠(にわかたやく/번주의 비서·호위)'가 되어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섬기는 이례적인 출세를 이룬다.
번주의 명으로 각지에 파견된 사이고 다카모리는 후지타 도코(ふじたとうこ), 하시모토 사나이(はしもとさない) 등 인품과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인맥을 넓히며 정치가로서 힘을 키워가던 중,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급사하고 만다.
충격으로 순사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승려 겟쇼(げっしょう)의 설득으로 다시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농정을 맡는 직책에서 번주의 측근으로, 이례적인 출세를 이룬다
농정을 맡는 직책에서 번주의 측근으로, 이례적인 출세를 이룬다

사쓰마번 군의 최고 사령관 겸 외교 책임자로 임명

1858년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いいなおすけ)가 주도한, 막부 반대파 탄압인 '안세이 대옥'이 시작되며 잇키바시파의 겟쇼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숨겨주었지만, 사쓰마번은 겟쇼의 보호를 꺼려 '휴가로의 추방=살해'를 명령했다.
모든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로 향해 투신한다.
겟쇼는 사망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아마미오시마로 유배되어 이름도 기쿠치 겐고(きくちげんご)로 바꿨다.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의 공작으로 사쓰마번으로 돌아오지만, 실권을 쥔 시마즈 히사미쓰(しまづひさみつ)의 노여움을 사 도쿠노시마, 오키노에라부섬(おきのえらぶじま)으로 다시 유배된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랑하던 일본은, 잇따른 역사적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1862년 사쓰마번사가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 영국이 보복한 '삿에이 전쟁'으로 발전한다.
또한 사쓰마번 등이 존양파 세력을 교토에서 축출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결국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다른 길에 몰리고, 인재 부족을 한탄하던 사쓰마번 내부의 요구 속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면된다.
약 1년 반 만에 돌아온 사이고 다카모리는 군부야쿠 겸 쇼한 오셋케이(군의 최고 사령관·외교 책임자)에 임명되며, 사쓰마번의 중신으로 자리 잡아간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배된 오키노에라부섬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배된 오키노에라부섬

적대하던 조슈번과의 동맹

사쓰마번으로 돌아온 사이고 다카모리는 교토에서 일어난 '긴몬의 변'에서 지휘를 맡아 조슈번 토벌에 성공한다.
이 일로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앙금은 더욱 깊어졌고, 막부는 조슈 정벌의 칙명(제1차 조슈 정벌)을 내렸다.
참모로 임명된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 막부의 중신 가쓰 가이슈와 회담한 결과, 온건하게 수습하는 길을 택한다.
막부와 조슈번을 설득하자 정벌 명령이 풀리며, 양측은 싸우지 않고 '제1차 조슈 정벌'은 종결됐다.
하지만 막부 내에서 다시 조슈를 치자는 목소리가 되살아나 '제2차 조슈 정토'가 발령된다.
같은 시기 사카모토 료마(さかもとりょうま)를 매개로, 대립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접근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양쪽이 한 걸음씩 양보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조건을 제시하자, 두 세력은 화해한 뒤 '삿초 동맹'을 맺는다.
동맹에 따라 사쓰마번은 '제2차 조슈 정토' 참전을 보류한다.
그리고 병력 차로는 열세였던 조슈번이 높은 사기로 공세를 펼쳤고, 마지막에는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とくがわいえもち)의 급사로 막부군이 실패하며 '제2차 조슈 정토'는 막을 내렸다.

삿초 동맹의 주역이 된 사카모토 료마
삿초 동맹의 주역이 된 사카모토 료마

신정부의 성립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죽음으로 제15대 쇼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とくがわよしのぶ)가 취임했다.
도막을 향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사쓰마번·조슈번·도사번 등의 유력자가 모인 '시코 회의(しこうかいぎ)'에서 방책을 세우지만, 발이 맞지 않는다.
그 무렵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도막의 밀칙을 조정에서 얻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선수를 치듯 정권을 조정에 반납하는 '대정봉환'을 상주한다.
도막 계획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조정 측에 정치 역량을 지닌 인물이 부족해 막부 측에 가까운 공가들이 권력을 잡았고, 실권은 여전히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쥔 채였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이와쿠라 도모미(いわくらともみ) 등이 요시노부 측 공가를 일소하는 쿠데타를 모의하고, 메이지 천황(めいじてんのう)의 칙명으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표한다.
성공으로 끝나자 에도 막부는 폐지되고 삼직(총재·의정·참여)이 설치되며 신정부가 성립했다.
또한 같은 날 열린 고고쇼 회의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관위와 영지를 조정에 반납·반환하는 '사관납지'도 결정됐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표된 교토고쇼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표된 교토고쇼

에도성 무혈 개성

실각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 구막부군은 '오사카성'을 거점으로 삼았지만, 사쓰마번 토벌 명령에 따라 도쿄로의 진군을 시작한다.
이를 신정부군이 맞받아친 '보신 전쟁※도바·후시미 전투'가 1868년에 발발했다.
신정부군이 우세하게 전개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성'으로 탈출을 꾀했고, 조정은 요시노부 추토령을 내린다.
이렇게 전장의 무대가 에도로 옮겨가고, 동정대총독부하 참모를 맡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스ンプ성'에서 에도 총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전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자 야마오카 뎃슈(やまおかてっしゅう)가, 귀순 의사를 담은 편지를 들고 사이고 다카모리 앞에 나타난다.
교섭에 응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도쿠가와 처분안 7개 조항'을 제시하고, 문답을 거듭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바탕으로 가쓰 가이슈와 두 차례 회담에 나서자, 미토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근신·무기 등의 반환 같은 조건 아래 '에도성' 인도가 결정된다.
그 결과 에도 총공격은 중지되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성 무혈 개성'을 실현했다.
이후 신정부군에 맞선 세력의 '우에노 전쟁' 등이 일어났지만, '하코다테 전쟁'을 끝으로 항복을 표명하며 '보신 전쟁'은 막을 내린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한 가쓰 가이슈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한 가쓰 가이슈

신정부의 다양한 개혁

메이지 정부 수립 후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에 남는 것을 거절하고 고향에 머물며, 사쓰마번의 번정에 참여했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관직자의 부패와 반란 사건으로 이른 시기에 권위가 흔들리고 재정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각지의 번을 폐지하고 신정부 직할로 관리하는 '폐번치현' 행정 개혁을, 인망이 두터운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요청하는 형태로 정부 복귀를 의뢰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설득이 성과를 거두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를 받아들여 '고신페이'라는 군 조직에 초청된다.
번주의 반발을 예상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각오로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을 단행하게 했다.
같은 해 '이와쿠라 사절단'의 이와쿠라 도모미·기도 다카요시 등이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구미로 출발한다.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수 정부'의 실질적 수장을 맡아 '징병령'·'학제'·'지조 개정'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한다.
하지만 이와쿠라 사절단과 유수 정부 사이에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주고받은 바 있어, 양측의 마찰이 커져간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도도부현 구분은 이 시대에 확립됐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도도부현 구분은 이 시대에 확립됐다

세이난 전쟁에서 자결

마찰이 커지는 한편, 메이지 정부는 외교 문제에도 직면했고 특히 조선 문제를 둘러싼 '정한론'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직접 조선에 가겠다는 주장을 고수해 각의에서 결정까지 끌고 가지만, 반대파의 압력으로 번복되어 조선 원정은 연기된다.
격노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의를 표명하고 가고시마로 귀향했으며, 뜻을 같이한 관료·군인 등 약 600명도 잇따라 사직했다.(메이지 6년의 정변)
귀향 후에는 유렵·온천 요양 등 평온하게 지내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학교 설립 이야기가 들어온다.
이를 받아 설립에 관여하자, 사학교는 점차 현정을 쥐는 세력으로까지 확대된다.
당시는 특권을 빼앗긴 사족의 반란이 잇따르던 때라 메이지 정부는 경계했고, 불만 사족들은 봉기를 기대하며 가고시마의 동향을 살폈다.
서로 견제하던 가운데, 사족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낀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는 거병을 결심한다.
이렇게 사이고 군과 정부의 정토군이 싸운 '세이난 전쟁'이 구마모토에서 일어나, 약 7개월간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정부군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신의 개입으로 향년 49세에 세상을 떠난다.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공로자였지만, 사후에는 역적으로 규정되어 관위를 박탈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의 인품에 매료된 메이지 천황 등의 노력으로 1889년 '정삼위'가 추증되며 복권을 이룬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생을 마감한 곳에는 지금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생을 마감한 곳에는 지금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일화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일화 3가지를 소개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베일에 싸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해가 더 깊어질 것이다.

10마리 이상 키울 정도로 유명한 애견가

사이고 다카모리는 애견가로 유명하며, 많을 때는 10마리 이상 키웠다고 한다.
동상으로도 남아 있는 사쓰마견 '츠ン'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개는 사냥 목적의 사육이 일반적이었는데, 반려로만 키운 것만 봐도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 밖에도 개를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일화는 장어와 닭 등 사람 먹을 음식을 자신보다도 우선해 개에게 먹였다는 이야기다.
또 전쟁에도 개를 데리고 갔다는 일화가 있어, 최후를 맞은 '세이난 전쟁'의 전장에도 함께 데려갔다.
마지막에는 개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다며 목줄을 풀어 도망가게 했다는 점이, 사이고 다카모리답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키우던 사쓰마견 동상
사이고 다카모리가 키우던 사쓰마견 동상

부인이 격노? 우에노 공원에 세워진 동상

우에노 공원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이 있으며, 도쿄 3대 동상 중 하나로 꼽힌다.
1889년에 역적이라는 오명이 벗겨진 것을 계기로 동상 건립안이 떠올라 1898년에 완성됐다.
제막식에 초대된 이토코 부인이 '우리 남편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며 화를 내, 처남 사이고 주도(さいごうじゅうどう)를 난처하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화가 난 이유는 유카타 차림에 조리를 신고 개를 데린 동상의 모습 때문이었다.
큰 위업을 이룬 인물인데도 정장이 아니고, 게다가 이런 차림으로 외출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에노 공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동상을 찬찬히 살펴보자
우에노 공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동상을 찬찬히 살펴보자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살이 쪘다

술을 못 마시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기름진 돼지고기와 장어를 좋아했고, 카스텔라 같은 단것도 즐겼던 듯하다.
운동 습관도 없고 메이지 유신으로 몹시 바빴던 탓에, 체중이 100kg을 넘는 건장한 체형이 되어 갔다.
보다 못한 메이지 천황이 독일인 의사에게 진찰을 명했더니 '메타볼'이 드러난다.
그 결과 사이고 다카모리는 식이 제한·투약·사냥/산책을 통한 비만 치료(다이어트)를 시작해, 3년 만에 80kg까지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로 치면 메타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늘날로 치면 메타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언

일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이고 다카모리도 다른 위인들처럼, 아래와 같은 다양한 명언·격언을 후세에 남겼다.

  • 결심했으면 하세요. 책임은 제가 집니다.
  • 내설매화려(ゆきにたえてばいかうるわし/고난을 견디고 넘어서면 큰 성장이 있다)
  • 몇 번이고 고생을 겪고 나서야 뜻이 비로소 굳어진다.(사람은 힘든 경험을 여러 번 겪고서야 뜻이 단단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경천애인(けいてんあんじん)'.
이 말에는 '하늘(만물)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귀한 것으로 여겨 공경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출신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학문과 교육에서 자주 강조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경영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 중 하나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인연이 있는 스폿

사이고 다카모리와 인연이 있는 3곳을 소개한다.
어느 곳이든 사이고 다카모리의 업적과 막말의 풍경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로 추천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더 알고 싶다면, 꼭 직접 방문해 천천히 둘러보길 바란다.

1. 우에노온시 공원(우에노 공원)

도쿄도 다이토구에 있는 우에노 공원으로, 정식 명칭은 '우에노온시 공원'. 도쿄도 건설국 관할 공원이며, 면적은 53만 제곱미터로 규모가 크고 역사도 깊다.
봄에는 벚꽃 명소로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등, 도쿄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다.
앞서 일화에서 소개했듯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이 있어 포토 스폿으로도 인기다.

도쿄도 내 최대 규모의 벚꽃 명소
도쿄도 내 최대 규모의 벚꽃 명소

2. 시로야마

해발 약 107m 전망대에서 시가지와 긴코만,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로야마.
주변 일대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세이난 전쟁 마지막 격전지로, 가고시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과 사이고 군 사령부가 놓였고, 자결 전 5일간 머문 '사이고 동굴', '사이고 다카모리 종언의 땅' 등 사적이 남아 있다.

도시 최고의 전망 스폿
도시 최고의 전망 스폿

3. 고잔 공원

'일본 역사 공원 100선'에도 선정된 넓은 공원.
원내에는 국보로 지정된 오층탑을 비롯해 다양한 사적이 곳곳에 있다.
최고 볼거리는 국보 '루리코지 오층탑'으로, 일본에 현존하는 오층탑 가운데 10번째로 오래됐다.
막말에 활약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등이 모였던 건물을 재현한 '친류테이(ちんりゅうてい)'도 꼭 볼만하다.

국보 오층탑을 품은, 역사 분위기 가득한 공원
국보 오층탑을 품은, 역사 분위기 가득한 공원

사진

  • 새 시대의 개막과 근대화에 기여한 위인

    새 시대의 개막과 근대화에 기여한 위인

  • 새 시대의 개막과 근대화에 힘쓴 사이고 다카모리

    새 시대의 개막과 근대화에 힘쓴 사이고 다카모리

  • 무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힘쓴 어린 시절의 사이고 다카모리

    무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힘쓴 어린 시절의 사이고 다카모리

  • 농정을 맡는 직책에서 번주의 측근으로, 이례적인 출세를 이룬다

    농정을 맡는 직책에서 번주의 측근으로, 이례적인 출세를 이룬다

  •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배된 오키노에라부섬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배된 오키노에라부섬

  • 삿초 동맹의 주역이 된 사카모토 료마

    삿초 동맹의 주역이 된 사카모토 료마

  •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표된 교토고쇼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표된 교토고쇼

  •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한 가쓰 가이슈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한 가쓰 가이슈

  •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도도부현 구분은 이 시대에 확립됐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도도부현 구분은 이 시대에 확립됐다

  • 사이고 다카모리가 키우던 사쓰마견 동상

    사이고 다카모리가 키우던 사쓰마견 동상

  • 우에노 공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동상을 찬찬히 살펴보자

    우에노 공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동상을 찬찬히 살펴보자

  • 오늘날로 치면 메타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늘날로 치면 메타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 도쿄도 내 최대 규모의 벚꽃 명소

    도쿄도 내 최대 규모의 벚꽃 명소

  • 도시 최고의 전망 스폿

    도시 최고의 전망 스폿

  • 국보 오층탑을 품은, 역사 분위기 가득한 공원

    국보 오층탑을 품은, 역사 분위기 가득한 공원

사이고 다카모리 프로필

이름
사이고 다카모리
출생 연도
1828년
사망 연도
1877년
향년
49세
출생지
가고시마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