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찰이 커지는 한편, 메이지 정부는 외교 문제에도 직면했고 특히 조선 문제를 둘러싼 '정한론'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직접 조선에 가겠다는 주장을 고수해 각의에서 결정까지 끌고 가지만, 반대파의 압력으로 번복되어 조선 원정은 연기된다.
격노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의를 표명하고 가고시마로 귀향했으며, 뜻을 같이한 관료·군인 등 약 600명도 잇따라 사직했다.(메이지 6년의 정변)
귀향 후에는 유렵·온천 요양 등 평온하게 지내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학교 설립 이야기가 들어온다.
이를 받아 설립에 관여하자, 사학교는 점차 현정을 쥐는 세력으로까지 확대된다.
당시는 특권을 빼앗긴 사족의 반란이 잇따르던 때라 메이지 정부는 경계했고, 불만 사족들은 봉기를 기대하며 가고시마의 동향을 살폈다.
서로 견제하던 가운데, 사족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낀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는 거병을 결심한다.
이렇게 사이고 군과 정부의 정토군이 싸운 '세이난 전쟁'이 구마모토에서 일어나, 약 7개월간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정부군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신의 개입으로 향년 49세에 세상을 떠난다.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공로자였지만, 사후에는 역적으로 규정되어 관위를 박탈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의 인품에 매료된 메이지 천황 등의 노력으로 1889년 '정삼위'가 추증되며 복권을 이룬다.